묘지와 나무

 

인간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 있음에도, 좋은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가족간의 존대, 연장자에의 공경의 모습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좋은 가치관으로서 이어져 내려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과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우의 모습도 대체로 좋은 같습니다. 언급하고자 하는 내용에 저의 경우도 그다지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그러기에 또한 다루어야 한다고 보입니다. 그런 와중에 생각해 보면 어떠한가의 차원으로 글을 적어봅니다.

많은 정보의 습득, 확인 등이 가능한 세대입니다. 인구가 많아지고, 여러 필요가 늘어나고, 그에 맞는 여러 준비를 재어보는 , 복잡하고 다단한 세대입니다. 시대의 변천에 무심할 수는 없으며, 어느 정도 살펴 봐야 하는 때입니다. 늘어나는 인구만큼 공간의 협소화를 우려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여러 선도적 기관의 자료의 발표는 불과 수십년 정도의 앞날의 공간의 협소화에 대한 글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무한한 공간의 사용가치의 단계로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아직 이행하지는 못하고 있고, 때가 되면 또한 가능한 때가 수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현재의 가치를 낭비해서는 곤란하다고 여겨집니다. 여러 가지 개선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잘못된 가치관의 반복적 답습은고해야 한다고 봅니다. 공간의 사용가치로서 땅의 효과적 사용이 중요한 때입니다. 과거에야 생각이 이르지 못해 그러한 모습이 있었을 수는 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들어서도 무지의 관습대로 여전한 모습을 유지함은 어찌 생각해야 하는가요. 오늘날이야 말로   살펴 행하여야 하는 때입니다. 때를 맞춘 삶이어야 합니다. 가운데 논란 가능한 것으로서, 땅을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공간으로서 사용해야지, 죽은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모습에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이미 오래 전, 창조주께서 만드신 인간의 후손들 가운데, 때에 맞는 가르침을 사람들을 통해서 알리셔 왔습니다. 그 중에 구약시대의 모세도 대표적인 인물로서, 그 죽음의 묘지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러 사람을 통해서도 메시지를 전해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도 묘지에 묻히시기는 하였어도, 그 묘지는 굴의 형태로서, 죽은 자의 시체가 부패가 다 되면 뼈를 추스려 따로 모으고, 계속 그 공간을 죽은 자가 사용하게 하는 형태인 것이었습니다. 묘지의 최소화의 한 방안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모습은 거의 장례식장 등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그 묘지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여, 묘지 문화를 이루어 내야 하는 당위적인 그 관련성을 살펴 볼 수는 없다고 생각 됩니다. 그만큼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묘지 자체의 필요를 부인하지는 않으셨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승천을 통하여서 또한, 이 땅의 묘지에 별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유대 지방의 풍습도 묘지 사용은 최소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수 천년이 흐른 요즘 여전히 인구의 사망 증가에 따른 묘지 사용을 계속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앞으로는 어떠할까요. 이를 통해 보건대 그 가르침의 모습을 살펴 그것이 진리인지를 살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적 메시지는 그러므로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이고, 시대의 변천과 함께 할 수 있는 가치관이 되는 것이죠.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흘러, 세상의 다양한 모습과 과학, 기술의 발전의 시대를 통하여, 인간의 지식은 많이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위성과 여러 항공 장비를 통해 지구의 구석구석 모습을 일반인이 손쉽게 있는 시대에 이르렀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세상의 좋은 모습 구경을 손쉽게 하게 되어 좋습니다. 인터넷으로 한국 아니라, 전세계를 살펴보면 좋은 풍경이 많습니다. 그런데, 불편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의 산하를 살펴보면, 일부라고 생각하기에는 과도한 녹지의 묘지화에 우려를 감출 없습니다. 개인의 수준으로는 괜찮다는 생각, 무심함으로 그러하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는 대체로 거스르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 봅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 그리고, 갈수록 늘어나는 인구 등을 살펴 볼때, 시대착오적인 모습이지는 않는지 자문해 봐야 시기입니다. 오래 전부터, 살폈어야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다음에 묘지들을 한번 파내어 내는 공사가 삶에 도움이 되므로 그러한 점을 감안하여 행하는 이라는 주장을 하신다면, 접근이 완전히 틀리다고는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러한 에너지를 애초에 좀 더 알맞게 사용하게 되므로, 궁극적으로 좋은 결실에 이루게 것으로 보입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음에도, 그 늦은 때가 그리 늦지 않은 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살펴 봐도, 죽으신 후 묘지에 놓이시고, 부활 하셨습니다. 육체적 부활이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함' 이라는 말씀이 생후에 적용 가능한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삶의 기간으로서는 육체와 영의 유익함이 있고, 죽은 후 부활의 연장선상으로 육체는 무관하다고 여겨야 한다고 보입니다. 예수님과 일반인을 동일시 함은 곤란하다고 보입니다. 출생의 모습이 같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로 부활하실 수 있으셨고, 승천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신 신성을 가지고 계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죽음 이후 육체가 아닌, 영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살필 수 있습니다. 보통 인간이 예수님과 같이, 육체의 죽음, 부활, 승천을 기대한다면, 자신이 신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잘못된 방향이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성경에 죽은 후 살리신 모습이 등장합니다만, 이는 예수님에 의하여 가능했던 것이고, 잠시의 기간이었고, 매우 희박한 경우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혹시 자신의 육체도 부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묻히시거나, 묻히시고자 하는 분이 계시다면, 착각과 미혹되어 있지는 않는지 살펴 봐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에 없던 모습, 과거에는 다른 모습 등으로 거리감의 느낌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오늘의 가운데 과거에 없음에도 사용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어 사용하는 것도 많습니다. 오늘날, 여러 좋은 교통의 체계가 형성되어 있음에도, 여전히 모든 목적지를 걸어서만 가겠다 주장은, 물론 일부 국한된 경우에는 가능할 있을 것입니다만, 그것의 잘못은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변하지 않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묘지의 사용일 것입니다. 변화되어 좋은 것이 있고, 변화되어야 것이 있다고 보입니다. 이는 인종, 종교, 지역을 초월하여 생각해 봐야 하는 인류의 삶의 문제입니다. 변화되어선 되는 것과 되어야 것은 시대와 더불어 인간의 삶에 어떠한 영향으로 다가오게 되는지를 살펴보면 것입니다.

화장을 통하여 최소한의 기림을 위한 공간 사용이 시대에 맞는 좋은 방안으로서 이미 많은 분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매장의 경우, 그 공간을 홀로이 사용해서는 곤란하다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매장을 선호한다면, 시체를 여러 층으로 쌓아 올리는 방법, 묘소를 건물, 지하에 만드는 방법, 터널을 뚫는 방법, 등 여러 제안적 생각을 해봐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평지도 물론이고, 산이 많은 경우, 산의 내면의 그 넓은 공간을 사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는 추가적인 비용이 증가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땅의 위를 포함하여, 아래의 공간을 사용 함으로서 오히려 효과적이라고 여겨집니다. 알다시피, 깊은 땅의 표면만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이든 평지이든 위에는 자연의 수목들이 본래의 모습으로 자라는 그러한 모습 내지는, 나름의 좋은 방안으로 가꾸면 좋다고 보입니다. 지역마다 특정 장소의 평지, 산을 정하여 자체를 공원 공동 묘지화 작업을 하는 것이 좋은 방향이라고 여겨집니다. 지면 하단을 위주로 만들어진 장소에 화장을 통 하든, 뼈만 추스리는 등으로 최소화 하여 언급한 장소에 보관하는 방법, 기존의 형성되어 있는 묘지의 이전의 접근 등은 지구에의 인간의 삶을 지속적으로 풍요롭게 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산발적인 개인 묘지화와 지속적인 산림 훼손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당사자에게 있는 공허한 허상의 마음을 변형되어 표현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과도한 이기심은 없는지, 창조주께서 주신 자원을, 그리고 내게 있는 것을 잘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넓은 나라는 넓다고 안심하여 자만해선 곤란하고, 좁은 나라는 좁다면서 생각 없이 불평해선 곤란한 때이라고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너무 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일 입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대답합니다. 괜찮습니다. 살펴보면 그래도 지낼 합니다. 찾아보면 아직도 거할 곳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May 2015

 

나무는 인간을 도와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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